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보의 난 (문단 편집) == 반란 토벌 == 서기 860년 4월 23일, 남로군은 반란군이 점거했던 옥주재를 공략했다. 뒤이어 24일에 신창재를 공략하고 반란군 장수 모응천을 깨뜨린 뒤 당흥을 탈환했다. 5월 2일에 동로군이 반란군 장소 손마기를 영해에서 깨뜨렸으며, 9일에 남로군이 반란군 장수 유왕과 모응천을 당흥의 남곡에서 크게 격파하고 모응천의 목을 베었다. 이보다 앞서 왕식이 군사가 적어서 주문을 올려 충무와 의성군을 징발하고, 소의군을 요청하자, 당의종은 이를 따랐다. 이에 삼도의 군사가 월주에 도착하자, 왕식은 충무의 장수 장인에게 300명을 거느리고 당흥에 주둔하여 반란군이 남쪽으로 나가는 걸 차단하게 했으며, 의성의 장수 고라예게는 300명을 거느리고 태주의 토군과 합세한 뒤 지름길을 통해 영해로 가서 반란군의 소굴을 공격하게 했다. 또 소의의 장수 혈절규로 하여금 400명을 거느리고 동로군과 합세해 반란군오 명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게 했다. 11일에 남로군이 해유진에서 반란군을 대파하자, 반란군은 용계동으로 철수했다. 19일에 관군이 동굴 입구에 주둔하자, 반란군이 동굴을 나와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20일에 고라예가 반란군의 별수 유평천의 영채를 기습하여 크게 이겼다. 이리하여 관군은 반란군과 19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상황이 이와 같자, 유왕이 구보에게 항의했다. >"지난번에 나의 계책을 좆아 월주에 들어갔으면 어찌 이런 고통이 있겠습니까!" 유왕은 녹색 옷을 입고 있던 왕로 등 진사 몇 명의 목을 모조리 베며 말했다. >"나의 계책을 어지럽힌 자는 이 푸른 벌레들이다!" 이 무렵, 고라예는 영해에서 승리한 뒤 도망하고 흩어진 백성을 거두어 7천여 명을 얻었다. 왕식은반란군이 바다로 도망치면 세월이 지나도 사로잡을 수 없다면서, 고라예에게 해구에 진을 쳐서 적이 바다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망해의 진장 운사익과 절서 장수 왕극용에게 명령해 수군을 거느리고 해변을 돌도록 하였다. 운사익 등은 반란군 장수 유간을 영해의 동쪽에서 만났는데, 반란군은 적관군이 오자 모두 배를 버리고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관군은 적의 배 17척을 확보한 뒤 모조리 불살랐다. 구보는 영해를 잃자 무리를 인솔하여 남진관 아래에 주둔하느 그 수가 1만여 명이었다. 관군은 이들을 압박해 들어갔고, 5월 22일 동로군이 반란군 장수 손마기를 상류촌에서 깨뜨렸다. 이에 반란군 장수 왕고가 귀순했다. 5월 29일 동로군이 구보를 남진관에서 크게 격파하고 수천 급을 참수했다. 이에 반란군은 비단을 길에 가득 버려서 관군이 이를 줍느라 자기들을 쫒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혈절규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돌아보는 사람은 머리를 베겠다!" 병사들은 감히 비단을 줍지 않고 반란군을 계속 추격했다. 구보의 반란군은 관군에게 쫓기다가 6월 5일에 섬현으로 들어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관군은 구보가 숨은 곳을 알지 못해 헤맸다. 이에 의성의 장수 장인이 당흥에서 반란군 포로를 잡아 고문하자, 포로가 "구보는 섬현으로 숨었습니다. 저를 놓아주면 군대를 위해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장인은 그를 앞세워 섬현에 도착한 뒤 동남쪽을 막았다. 왕식은 구보가 섬현에 숨었다는 보고를 듣자 명령을 내려 동, 남 양로군에게 가서 섬현에서 합류하게 하고, 12일에 섬현을 포위했다. 구보가 성을 매우 굳게 지켜서 쉽게 함락되지 않자, 제장은 냇물의 물길을 끊어서 물을 마르게 할 것을 논의했다. 구보는 이를 막기 위해 출격했고, 사흘간 83회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구보는 패하여 성으로 도망쳤지만, 관군 역시 피해가 크고 지쳤다. 구보가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자, 제장은 이를 왕식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왕식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적은 조금 쉬려고 할 뿐이다. 더욱 삼가 대비하면 공로가 바로 이루어진다." 구보는 과연 다시 출격하여 3차례 교전했지만, 관군이 사전에 대비해둬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월 21일 밤에 구보, 유왕, 유경은 100여 명을 이끌고 나와 성과 수십 보 떨어진 거리에서 관군에게 항복 의사를 청했다. 이에 관군이 빨리 달려가 성과 그들의 사이를 차단하고, 구보 일당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이리하여 7개월간 이어진 구보의 반란은 종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